나의 피투성이 연인
"무서운 속도의 시대입니다. 비정한 얘기지만, 한 달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를 잊기 시작할 것입니다. 올해가 지나면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 외엔 그를 기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의 격렬한 애도 기간은 대체로 3개월이라 하더군요."
ㅡ 19.
6. 13.
나의 어디가 좋아?
모르겠어.
말해 줘.
모든 게 좋아.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고개를 갸웃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의 어디가 좋아? 그 질문은 유선이 기억하는 질문이다. 아주 오래전, 둘이 처음 안았던 날, 유선이 했던 질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많이?는 유선의 질문이 아니었다. 모든 여자들은 그렇게 묻는 것일까. 나의 어디가 좋아? 그때도 그는 너의 모든 것, 이라고 말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다만 유선은 주현의 입술에 가만히 제 입술을 대었을 뿐이다. 그렇게 많이? 라고 묻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 하지도 않았다. 그의 사랑은 너무도 견고해서 일생을 끌로 긁어도 닿지 않을 바위 같았으므로.
ㅡ 32, 33.
분노를 폭발시킬 상대는 존재하지 않는데 살갗이 벗겨지도록 제 살을 긁어 대야만 하는 자신만이 혼자 남아 있었다.
그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둘 사이엔 깊은 우물이 있었다. 그가 옆에 있을 땐 우물의 존재를 몰랐다. 너무 가까이 있는 건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의 시력이니까. 그 심연 속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사랑도, 결핍도, 원심력도, 구심력도, 피로한 감정의 순간도, 은닉된 삶의 조각들도. 그 조각들을 다 맞추어도 기어이 떠오르지 않는 지난 생의 밑그림. 끝내 찾을 수 없는 몇 개의 조각들이 여기 있다. 둘 사이의 우물은 너무 깊고 어둡고 그리고 차갑다.
ㅡ 37.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는 확실히 그런 순간이 있어. 사랑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예민하게,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둔감하게 만들어 버리는 감정의 알레르기 상태 같은 것이니까.
ㅡ 52.
그는 내 남자가 아니었어요. 난 상속권이 없다고요
ㅡ 53.
유선의 마음속에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지나치게 많이 섞여 있었다. 그에 대한 제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 무엇인지, 정확히 이름 붙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외로움이든, 슬픔이든, 부끄러움이든, 미움이든, 박탈감이든, 배반이든, 모멸이든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많은 감정이, 쏟을 길 없는 상대를 향해 간헐천처럼 뜨겁게 예고 없이 솟아올랐다. 매번 소스라쳤고 매번 화상이었다.
ㅡ 55.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사랑을 주지 않는 나의 냉혹한 연인, 유선이여.
그때의 블러디는 서로의 손목을 날카로운 면도칼로 긋고 너의 동맥 속에 내 피를 흘려 넣고 싶었던, 혀를 깨물어 흘러나오는 너의 피를 삼키고 싶던 블러디였어. 델 만큼 뜨거웠던 39도의 블러디였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심장 자체를 원했던 블러디였지.
ㅡ 61.
병원에서 마지막 보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따. 피로 얼룩졌던 그 얼굴. 차갑게 식어 버리긴 했지만, 손목을 그어도 더 이상 피를 흘려 넣을 수 없었지만, 그의 멈추어 버린 심장 속에 내 뜨거운 피를 전부라도 흘려 넣어 주고 싶은 블러디 밸런타인이었다. 지금은.......
ㅡ 61.
유선은 제 속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뜨거움과 차가움이 제각각의 온도를 유지한 채 엉겨 있음을 바라본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외상(外傷)이라. 바깥에서 온 상처. 너에게서 온 상처. 피 흘리는 상처라면 차라리 빨리 아물 텐데.
ㅡ 66.
질투란 팽팽한 세 개의 힘에서 나온다. 하나가 없어진 지금 질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서는 다만 외상(外傷)일 뿐이다.
ㅡ 68.
딸에게 완벽했던 아빠. 7년 동안 연인이 되어 주었던 아빠. 한 점의 실체도 없는 환영이란 결점이 없어서 위험한 것이다. 누추하고 비굴하고 무능한 인간의 모습을 목격할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아이에게 아빠는 언제까지나 완벽한 남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 공간에서 숨 쉬고 밥을 먹고 타인에게 야비해질 수 있으며 사소한 일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치사한 모습을 보면서 아빠도 제 속에 있는 것들과 같은 문제와 결함을 가진 인간임을 알아 가게 될 기회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ㅡ 69.
너무도 익숙한 그의 얼굴 대신, 그 모든 것들이 검은 인화지에 판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엉기어 있었다.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보그처럼 유선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 속의 어둠을 오래 응시했다.
ㅡ 71.
널 위해서가 아니야. 당신은 내 속에서, 언제까지나, 마지막 보여 주었던 그 모습처럼, 나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지나고 보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고 어떤 일도 견뎌 내는 게 인간이더라. 뭘 못 견디겠어. 오늘 밤 돌아가 당신의 파일을 열어 하나하나 딜리트 키를 누르고 가려움도 딜리트 키를 눌러 버리고, 그렇게 견뎌볼까 봐. 차갑긴 하겠지만 마지막 보았던 당신의 얼굴을 껴안고 말이야. 당신은 언제까지나 나를 물어뜯으며, 나의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피투성이의 연인. 잔혹한 연인. 당신이 특별히 가혹한 사람이란 생각은 안 해. 모든 연인은 더 사랑하는 자에게 잔혹한 존재이니까.
ㅡ 84.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하지 않을래.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이보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ㅡ 84.
호텔 유로, 1203
대체로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분량과 색깔의 불행을 가진 사람들을 아주 싫어한다.
ㅡ 96.
듣는 심장의 심장에 칼을 꽂고 한 번 더 비틀어 주는 듯한 이 화려한 수사학이야말로 글로 먹고살아야 하는 내 인생의 근원이 어디였는지를 새삼스러이 깨닫게 해 주었다.
ㅡ 97.
선명치 못한 푸른색 옷은 내게 수인(囚人)의 그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엄마는 여전히 자신의 형량도 모른 채 그 옷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엄마의 통장 속에 든 알량한 푼돈은 결국 그녀의 고통을 덜어 내는 대가로 동그라미를 하나씩 지워 나갈 것이다.
ㅡ 98.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내게 사랑의 상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내게 남겨진 건 사랑의 상처가 아니다. 내게 새겨진 건 사람이 준 상처이며 기록된 건 사랑이 아니라 환멸의 언어들이다. 나는 누군가가 내 영혼의 자기장 깊숙이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랑 속에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따스함, 열정, 몰입, 기쁨, 까닭 없이 터뜨리는 웃음소리 같은 것만 있는 건 아 니다. 그 눈부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마치 빙산의 아랫부분처럼 거짓과 권태와 배신과 차가움과 환멸 같은 것들이 수면 아래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다.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거나 한다. 나로서는 그 상처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다시 누군가와 진짜 사랑을 하고 그 이면의 온갖 것들과 새로이 대면하고서야 비명을 지르는 그런 기억상실증 환자 같은 짓은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왜 사람들은 그저 아는 사람, 세 번째 우려낸 차처럼 담백한 관계 같은 그 지점에서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ㅡ 106.
지난겨울 동안 가끔 그를 만나 밥을 먹거나 술을 하면서 내가 그에게 원했던 것도 아주 단순했다. 그가 쓰는 시와 인간이 좀 달라졌으면 하는 것. 세상은 안팎이 같아서는 살아가기 힘든 곳이니까 두 개의 얼굴을, 가능하다면 세 개의 얼굴을, 할 수만 있다면 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에 서 파는 제주도산 돼지처럼 오겹살의 얼굴을 가지기를. 그러니까 나는 그를 단지 한 편의 시로 읽었을 뿐이다. 가여운 한 편의 시.
왜 사람들은 그저 아는 사람, 좋은 사람이야, 하는 그런 지점에서 멈추지 못하는 걸까. 이혼녀와 연하남의 연애란 아침 드라마 속에서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왜 미리 깨닫지 못하는 걸까. 맨발로 폭우가 쏟아지는 벌판을 달려 나가는 짓 따위는 영화 속에서 볼 때에나 근사할 뿐, 따라 했다간 찢긴 발바닥과 독한 신열과 상한 기관지를 쓰다듬으며 후회하게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교집합이 없이 산다면 그토록 평화로울 일상을 구태여 서로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서 피를 흘리고 몸 어딘가에 유탄을 박은 채 살아가려 하는 걸까. 지루해지면 게임 오버 버튼을 누르면 되는 컴퓨터 게임처럼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전쟁놀이를 하면서 진검을 휘둘러 피를 보는 건 그야말로 바보짓인데.
D가 결혼을 입에 담지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 빨리 그를 정리해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만 만나자고 말하려 했을 때에야 나는 깨달았다. 그 역시 내게 한 편의 가여운 시 이상이었다는 걸.
ㅡ 109, 110.
성스러운 봄
사람은 모든 불행이 자신은 비껴갈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자신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그런 열등한 운명의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불행에 대해 고통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ㅡ 147.
모든 슬픔에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나는 아내가 슬픔을 이겨 내게 되는 어느 순간까지 가해자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터무니없는 욕설이나 느닷없는 통곡이나 며칠을 계속되는 침묵이라도 견뎌 내려고 했다. 아내의 혈관에 나쁜 지방처럼 덩어리로 흘러다니는 슬픔이 녹아내리려면 분노든 슬픔이든 증오든 지독하게 뜨거워야만 할 것이다. 지독하게 뜨거워야만 그것들을 태워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ㅡ 151.
비소 여인
뜨거운 여름의 햇살과 과일의 마지막 단맛을 넘치도록 채워 주는 가을바람조차도 윤의 창백한 양 볼을 붉게 물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지독한 차가움이 이 여자의 가슴속에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어. 이 여자는 보험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멸을 지켜보는 것에 중독돼 버린 것 같아.
ㅡ 197.
나릿빛 사진의 추억
하긴 인생에서 무엇이든 한 가지만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을까. 탄 고기와 지나친 음주가 연합하여 종양을 만들고 폭우와 허술한 둑이 만나야 재앙이 시작되며 돈과 사랑이 둘 다 사라졌을 떄 연인들은 헤어지게 되지.
ㅡ 207.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쿨'하다는 건 제 외로움도 남의 마음의 서걱거림도 읽을 줄 모르는 불치의 병을 이르는 것일 뿐. 난 좀 더 끈적이며 질퍽이며 절룩거리며 걷고 싶어. 나는 이 골목집에 조금씩 감염되고 있는 것 같아.
ㅡ 276.
"산다는 건, 싸구려 픽션보다 더한 굴곡을 늘 이면에 감추고 있을 뿐이에요. 승우 씨나 나 역시 마찬가지고, 그것까지가 삶이에요."
ㅡ 287.
"필름, 내가 가지고 있을게요. 참, 제목이 뭐예요?"
두고 가면 버릴 것 같아서, 라는 말은 삼켜 버렸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무슨 뜻이에요?"
"대부분의 우린, 별이 아니라, 스스로는 빛나지 못하는 차갑고 검은 덩어리예요. 존재란 스스로 빛날 수 없는 것.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론 그믐도 되고, 그런 것 같아요."
ㅡ 288.
작품 해설
정미경 소설 속 문장의 온도는 언제나 체온보다 조금 낮아 서늘하다.
정미경 작가가 말하는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질문 하나쯤은 끌어안고 가야 하는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장소이다.
그에게 살아 있다는 것은 불안이다. 반짝거리며 비나는 것이 꺼질 수 있고, 미치도록 집중을 요구해서 발을 헛딛게 할 수도 있고, 그래 놓고 결국 어느 순간 갑자기 떠나 버릴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살아 있는 것들의 속성이다.
언제나 그렇듯 삶은 늘 소설보다 독하고, 예측 불허하며, 개연성이 떨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듯 이해되지 않는 세상을 그나마 견디기 위해 소설을 쓰고, 읽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